실험 민주주의: 실험 중심의 좋은 사회를 위하여

좋은 사회가 왜 중요한가

우리는 좋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는 결국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라는 말로 귀결된다. 우리의 욕구는 문화적으로 해결되며, 이는 욕구와 사회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좋은 사회의 문제는 우리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 글에서는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지,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를 논의한 뒤 현실적 한계를 논하려고 한다. 이 글이 좋은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좋은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좋은 사회란 결국 우리가 원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것을 논의할 수 없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사적인 자유와 공적인 자유, 그리고 풍요로운 생활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가 적절하다고 판단한 행동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남의 부적절한 행동으로부터 보호받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가난한 거지로서 자유를 누리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물질적 풍요 또한 바란다.

그러나 이런 사회는 “실패”와 “부조리”가 사라진 사회는 아니다. 그런 곳은 존재할 수 없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학적 관점에서 사회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건축물은 자연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인간에 의해 건설된다. 그런데 이 건축물은 필연적으로 구조적 결함을 가진다. 이론의 적용이 불완전하고, 설계 시에 간과하는 내용이 생기게 되며, 예상치 못한 일은 항상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 또한 “상식”과 사회과학 이론에 기초해 설계되고, 행위자 개인의 행동에 의해 구성된다. 사회 구조도 근본적으로 건축물과 같다. 따라서 건축물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결함”은 사회 구조에서도 필연적이다. 이는 경험적으로도 옳은 말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혁명은 쉬이 실패해왔다. 공산주의 혁명도 실패했다. 혹자가 “혁명은 자신이 낳은 자녀를 잡아먹는 신이다” 라고 말할 정도이다.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나

지금까지 좋은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자유와 풍요에 도움이 되는 그런 사회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힌트를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런 사회는 이탈과 항의의 방식을 통해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전체적인 구조 개혁 없이는 가망 없는 기획이다. 문제는 보통 이탈을 허용하지 않고 항의에도 둔감한 조직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조직들은 이탈과 항의가 효과를 볼 수 있는 유연한 형태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작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개개인의 협력을 강조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실험 정신”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고, 그 수단을 직접 조합해내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개인들은 진정한 “좋은 사회”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실험의 결과로 새로운 지식이 생겨날 것이다. 유용한 정보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파될 것이다. 설혹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실험자 개인에게 그 자체로 의미 있게 작용할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교육, 법적 개혁, 정치적 통제를 핵심으로 놓는 입장이 있겠다. 교육은 “실험정신”과 양립 가능 가능하므로 거부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법적 개혁”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거부해야 한다. 법적 개혁이란 구체적으로 처벌이나 인센티브와 관련이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집행”, 다시 말해 국가에 의한 규제와 감시를 동반한다. 그러나 국가의 통제 능력은 제한적이고, 국가가 취할 수 있는 합리성 또한 한정적이다. 게다가, 베버의 논의에 따르면, 권력은 쉬이 “신성화”되고 “정당화”된다. 이는 법에 기초한 행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게 만든다. 자유로운 이의 제기는 상술했듯이 중요한 메커니즘에 해당된다. 따라서 법은 좋은 사회의 핵심이 될 수 없다.

더불어 정치적 통제 또한 좋은 사회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이성적인 토론을 통한다면 단 하나의 최선의 제도를 찾을 수 있고, 단일한 합의에 이르리라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관점이 이런 주장의 전제가 된다. 그러나 이는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해당 주장이 참이라면, 파시즘과 나치즘의 등장, 그리고 막시즘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적 갈등이 최종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지금까지의 사회 사상사에서, 토론과 논의를 통해 이론이 무너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갈등에서 이론을 기준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려는 행위는, 그 상대방도 동일한 강도의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익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압도하는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합의의 결과가 “세계의 진실”과 일치한다는 인식론적인 보장이 없다.

사상적 한계

그러나 이런 관점은 몇 가지 한계를 가진다. 첫째,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영역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둘째, 실험적 관점은 상당한 규모의 불확실성을 사회에 강요한다. 셋째, “건전한 전통”이 유지되기는 쉽지 않으며 많은 자원을 요구하는 공동체는 쉬이 무너질 것이다. 넷째, 집단적인 유대감은 약화될 것이며, 다섯째, 일반인에 의한 잘못된 실험 기획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여섯째, 소집단 중심의 사회는 정부의 규제 역량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가능한 최선의 사회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변화하게 될 것이다. 여유가 없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이 없으며,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는 이에게는 전문가들의 “행동 유도”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최선의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성향과 모험 정신, 실험 정신이 가능한 이들에게는 실험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와 기타 기존의 제도적 장치들이 함께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는 실험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지원하는 제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부는 상술한 “실험적 사회”를 구축하는 보완적 역할을 맡고,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결론

좋은 사회는 우리가 좀 더 많은 사적 자유와 공적 자유를 누리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이다. 이런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토론에 의존할 수 없으며, 법에 의존할 수도 없다. 다만 실험과 소집단주의, 그리고 항의와 이탈 메커니즘의 강화를 통해서 시도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런 구조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정부 고유의 역할이 필요하다. 정부는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일반인들의 행동 유도를 시도해야 하고, 실험을 하는 시민들이 전문지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기반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한편, 이런 구조가 효과적으로 작용하더라도 한계가 발생함을 살펴 보았다. 예를 들어, 대규모의 동원을 필요로 하는 “규모의 경제”와 같은 문제들은 대처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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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0. 01. 15